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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걷다

도재경 소설가

1


등산

얼마 전 청계산에 갔다. 초입부터 새들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폭신한 보행 매트가 깔린 숲길은 정갈했고, 산들거리는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은 부산스럽게 금빛 조각을 흩뿌렸다. 본격적인 오르막 구간에 접어들자 나무 계단이 나타났다. 몇 해 전 조카와 함께했던 게임, <무한의 계단>이 떠올랐다. 습작 시절 썼던 단편소설도 생각났다. 만년 과장인 주인공이 계단이 사라져서 퇴근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잡생각도 잠시, 새소리는 오간 데 없고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계단은 지루하게 이어져 있었다. 어떤 층계는 높고, 어떤 층계는 낮았다. 솔직히 들쑥날쑥한 층계를 딛고 오르는 게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서서히 종아리가 딱딱하게 뭉치는 게 느껴졌다. 계단은 내 보폭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계단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계단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다수의 편익과 접근성을 위해 설계 기준에 따라 계단은 설치된 거니까. 알다시피 계단은 장애인이나 노약자 등 다른 보폭을 가지고 있는 보행 약자를 위한 시설물이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걸음걸이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안짱걸음을 걷고, 어떤 사람은 팔자걸음을 걷는다. 보폭도 제각각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보폭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계단에서는 그 사실이 깡그리 무시된다.


계단이 민망할까 봐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어느 조직보다 통일성을 요구하는 군에 입대하면 제식 훈련을 받는다. 난생처음 접하는 획일적인 훈련 방식 앞에서 대체로 버벅거리기 마련이다. 나만 잘하면 된다는 각오도 소용없다. 오히려 그러한 생각은 자칫 대열에서 이탈을 초래한다. 좌향좌, 우향우, 열중쉬어, 차렷, 앞으로가, 뒤로돌아가, 좌향앞으로가, 우향앞으로가, 제자리에서, 이런저런 구령을 따르다 보면 한두 명씩 발걸음이 엉키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여기저기에서 꼭 탄식이 터져 나온다. 거기에 더해 4분의 2박자 군가를 한목소리로 부르며 발을 맞춰 걷는 건 더더욱 고단한 일이다. 걸음의 종류는 또 어찌나 다양한지. 바른걸음, 큰 걸음, 빠른 걸음, 작은 걸음, 옆걸음 등이 있는가 하면 걷기를 빙자한 행진도 있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행군도 있다. 어쨌든 걷는 일이다. 한겨울 산속에서 혹독한 추위를 밤새 견뎌야 하는 것도 고되긴 하지만 가장 힘든 건 단언컨대 걷기다.


내친김에 개인적인 일화 하나를 터놓자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등을 딱 한 번 해본 적이 있다. 바로 군대에서였다. 화생방 훈련을 마치고 막사로 복귀하던 길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교육생들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교관은 악역을 자처했다. 오리걸음! 별수 있나. 소총을 어깨에 걸치고 쪼그려 앉았다. 다들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만 귓가엔 볼멘소리가 맴돌았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거 만만치 않다. 뒤뚱뒤뚱, 뒤뚱. 십여 분쯤 지났을까. 짙푸른 숲에서 그림자처럼 교관이 쓱 나타나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너, 걸었지?”
“아닙니다.”


교관이 손가락으로 내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돌이켜보면 나는 또래보다 뭐든 뒤처진 편이었다. 한글도 늦게 깨쳤고, 셈도 느렸고, 또래보다 키도 늦게 자랐다. 대학도 늦게 진학했고, 남들보다 군대도 늦게 갔으며, 사회생활도 늦게 시작했다. 심지어 등단도 늦었다. 그런데 내가 일등이라니. 별안간 외로워졌다. 누군가의 앞에 선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어쩌면 전생에 나는 오리였는지도 몰라.


교관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고선 다시 오리걸음을 시켰다. 뒤뚱뒤뚱. 교관은 뒷짐을 진 채 오리를 몰듯 내 뒤를 따라왔다. 이삼 분쯤 지나서 교관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비로소 내가 오리라는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웬걸.


“저기 나무 뒤에 숨어서 걸어오는 교육생들 번호 적어서 제출해.”


일등에게만 주어진 혜택이라고 하기엔 꽤 난감한 과제였다. 십여 분쯤 지나자 하나둘씩 교육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걸어오는 교육생은 아무도 없었다. 각자 저마다의 보폭으로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2


하산

가다 쉬다를 반복한 끝에 능선에 다다랐다. 거기부터는 울퉁불퉁 바위들이 뒤섞인 길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묻은 반질반질한 바위를 밟기도 하고, 낙엽이 어우러진 흙길을 밟기도 했다. 비로소 제 페이스를 찾은 것 같았다.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정상에서 숨을 고르고 나니 걸음마를 뗀 지 십여 년쯤 지났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곧잘 동네의 산에 오르곤 했다. 말이 동네 산이지 앞산, 뒷산, 이 산, 저 산 가릴 것 없이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대부분 천 미터 이상 높이였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인데 그곳이 우리나라에서 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가 가장 많은 동네라나. 어쨌든 어느 날은 정상에 올랐고, 어느 날은 계곡을, 또 어느 날엔 중턱에 있는 암자에 다녀오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오르막길을 만나면 나를 앞에 세웠고, 내리막길에서는 나를 뒤에 세웠으며, 평지를 걸을 땐 내 손을 잡았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할아버지는 언제나 내 걸음에 당신의 보폭을 맞추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의 거동이 불편해졌을 때 나는 할아버지의 걸음에 내 보폭을 맞추었다.


누군가와 보폭을 맞춰 걷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나 절친한 친구와 함께 길을 걸을 때면 노력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해진다. 그저 동행하는 사람과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서서히 땀이 식고 있었다. 슬슬 내려갈 때였다. 여러 갈림길 앞에서 머뭇거렸다. 어느 길로 갈까. 사실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는 게 가장 빨랐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그쪽으로 하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계단이 적은 오솔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작은 샘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았다. 거기부터는 경사가 완만해서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래, 지름길이 아니면 어때. 조금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네.


지름길은 비교가 전제되어 있는 용어다. 지름길은 비교 대상의 길이 있기 때문에 지름길이라고 말해진다. ‘빠르다’, ‘늦다’, ‘높다’, ‘낮다’, ‘넓다’, ‘좁다’ 등도 비교가 전제된 단어다. 일테면 우사인 볼트가 빠른 건 누구나 안다. 그가 빠른 건 누군가는 느리기 때문이다. 우사인 볼트보다 결승선에 늦게 들어온 선수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그 역시 최고의 선수임이 분명하다. 다만 우사인 볼트보다 늦었을 뿐.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비교를 당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저마다의 보폭으로 걷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과연 지름길이 있을까. ‘걷다’라는 동사에는 방향과 가능성이 담겨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오롯이 걷는 당신을 나무랄 자격은 없다.


도재경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했다. 소설집 『 별 게 아니라고 말해줘요』 , 『 춘천 사람은 파인애플을 좋아해』 를 펴냈고, 공저는 『 여행 시절』 , 『 소방관을 부탁해』 , 『 쓰지 않은 결말』  등이 있다. 심훈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을 수상했다.

저서 : https://search.kyobobook.co.kr/search?keyword=%EB%8F%84%EC%9E%AC%EA%B2%BD&gbCode=TOT&target=kyo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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