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초 사진
올해도 내 고향 경북 포항으로 벌초를 다녀왔다. 연년생 남동생을 태우고 선산까지 가는 길 내내 폭우를 뚫어야 했다. 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데 작업이 가능하기나 할지 걱정하며 조수석의 동생에게 얘기해 기상청 웹페이지의 위성 사진까지 검색해봤다.
동생과 나는 없는 걱정까지 짊어지는 기질이 아니다. 당장의 임무는 폭우 속에서 안전하게 가는 것뿐. 운전대를 다잡았다.
선산 앞, 숙부의 농막에 도착해서도 비의 기세는 그대로였다. 큰고모도 와 계셨는데 정정해 보이셔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고모는 조카들을 반기면서 어서 들어오라 하시고 방에 앉자마자 단감을 깎아 내놓으셨다.
자꾸 깎으시는 걸 다 못 먹는다 말씀드리니 가만히 나를 보신다. 나에게서 당신의 오빠 얼굴을 찾아보는 눈이 깊다. 숙부는 밖에서 비를 맞으며 이것저것 챙기시느라 분주하시다. 단감을 집어먹다 보니 귀가 아프게 농막의 천장을 때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친다. 아침 아홉 시. 여느 때보다 그리 늦지도 않았다. 나와 동생은 복장을 갖추고 숙부를 따라 나선다.
인적 드문 산에 누군가 우리보다 앞서 다녀간 흔적으로 초입의 길을 뒤덮은 풀숲에 널찍이 길이 나 있다. 예초기로 길 위의 풀을 밀어버린 건 본인들의 작업을 수월하게 하고자 함이라기 보다는 뒤에 올 사람들을 염려하는 보시에 가깝다. 작년에는 우리가 했던 일인데 그 덕을 크게 본다.
선산에는 문중 내 여러 집안의 묘가 곳곳에 모셔져 있다. 그만큼 선산에 오르내리는 벌초객이 많다. 요즘은 우리 형제가 따로 일정을 잡아 벌초하러 오는 바람에 사람들을 마주칠 기회가 적다. 마을의 일정과 겹쳐 진행할 땐 산이 북적거렸다. 그럴 때면 숙부는 산을 오가는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데, 누구든지 어느 집안인지 짐작이라도 하는 눈치였다. 나는 봐서 가까운 집안인 것 같으면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드리곤 했다. 그러다 보면 “야-가 종그이 형님 아들이라고?” 하며 놀라는 분도 더러 있었다.
아버지를 형님이라 부르는 이 할아버지는 누구실까. 아버지가 1948년생 쥐띠시니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 나이로 벌써 78세다. 저 어른보다 더 노인이 돼 계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늠되지 않는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애쓰기도 했다. 우리가 일정을 따로 잡는 바람에 몇 해째 벌초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는 집안 어른을 못 만나고 있는 건 못내 아쉽고 서운하다.
예초기를 둘러메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부터 풀들을 쳐낸다. 어릴 때 어른들이 낫으로 베어내는 걸 멀찌감치서 구경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말하셨다.
어느새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 여쭌다. 시원하신지요.
벌초를 하다 보니 어머니의 봉분에 토굴이 있다. 짐승의 소행이다. 숙부는 오소리일 거라고 한다. 파낸 흙이 굴 입구에 너저분히 널려 있고 굴의 크기는 무려 축구공 세 개쯤 너끈히 들어갈 정도다. 숙부는 혀를 차다가 삽을 가지고 와야겠다며 산을 다시 내려간다. 나는 터벅터벅 내려가는 숙부의 모습을 보다가 동생과 함께 예초기의 출력을 올린다.
풀을 베어내며 짐승이 봉분을 망가뜨리는 소행에 대해 생각한다. 잦은 일이라 이제는 속상하지도 않다. 숙부가 혀를 찬 것도 삽을 가져오지 않아 귀찮아서일 것 같다. 찾아오는 이 없는 산에서 어머니는 많이 적적하셨을까. 그래서 오소리 가족을 품어 그 적적함을 달랬을까.
폭우에 땅이 무르니 흙을 떠 채워 넣기도 수월할 것이다. 구름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골짜기로 시원한 바람이 한 번 휘돌아 나간다. 올해는 참 시원하네요. 두 아들 고생 덜 하는 모습 보며 안심할 어머니의 표정이 떠오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봉분을 다 정리했을 때서야 숙부가 삽을 들고 다시 나타난다. 환갑을 갓 넘긴 나이라 노인이라 하기엔 아직 이른데 작년 초에 턱을 크게 다치는 사고를 겪은 뒤로 많이 늙으셨다.
우리는 예초기 출력을 줄이고 검토를 기다린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숙부의 표정에 매서움이 해마다 덜하다. 우리 형제가 한방에 잘해놓았거나 작년보다 노련해졌을 리 없고, 조카들 고생 걱정에 욕심을 참는 마음이 먼저 읽힌다. 잔손질이 필요한 곳만 몇 군데 짚으셔서 거기를 정리하고 다음 묘로 옮긴다.
선산의 많은 묘 중에 일곱 개를 나와 내 동생이 숙부를 따라 다니며 벌초하고 있다. 증조부와 증조모, 조부와 조모, 그리고 방금 마무리한 부모님까지 여섯 개가 있고 아주 오랫동안 주인을 모른 채 벌초를 해오고 있는 묘도 하나 더 있다. 모두 쌍으로 있는데 이 무덤은 혼자다. 게다가 벌초를 하는 경로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보기에 썩 외롭다. 상석과 비석이 마련돼 있으나 애초에 허술했던 데다 오랫동안 낡고 헐어서 이제는 그것들을 흉내 낸 돌덩이일 뿐이다.
아버지가 계셨을 때 묘의 사연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던가? 들었더라도 어릴 때였으니 흘려들었을 테고 당연히 기억나는 게 없다. 사실 아버지가 묘의 내력에 대해 아셨는지 모르셨는지마저 확실치 않다. 집안끼리 벌초 일정을 맞추어 모이던 수해 전에도 내가 물어보면 그저 옛날부터 해오던 집안의 일이기에 함부로 그만둘 수 없다는 얘기만 있었을 뿐 사연에 대해 아는 어른은 없었다. 별스런 내막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모르는 것 같았다. 시절의 격변 속에서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느라 집안의 이야기는 자세히 전해지지 못했고, 선대부터 해오던 것이니 그냥 했을 뿐이었다. 선조의 묘를 보살피는 일을 함부로 관둘 수도 없었겠다.
미스테리한 묘의 위치는 수직으로 따졌을 때 증조부의 자리 아래고 조부의 자리에서는 위에 있다. 나로선 벌초하는 경로에서 저만치 벗어난 곳에 자리한 무덤 하나가 아주 오랫동안 고깝게만 보였다. 어린 나는 뙤약볕을 견디며 갈퀴 하나 들고 어른들을 따라다니다가 베어놓은 풀을 건성으로 치우면서 언제 끝나려나 하고 눈치만 보았다. 하나의 묘를 마치면 또 다른 자리로 옮기는 일이 종일 이어지는 것만 같아 내내 지쳐 있던 내 마음에는 집안의 내력이니 묘의 주인이니 하는 그런 호기심이 들 자리가 없었다.
머리가 좀 굵어진 뒤로도 나의 뿌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았다. 본이 무엇이니 파가 무엇이니, 몇 대손이고 몇 세 손이니 하는 이야기가 시험 범위의 어떤 항목처럼만 들렸다. 외우긴 외웠으되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생각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내가 벌초와 제사를 모시는 모양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냥 숙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굴었다. 향 켜라, 잔 놔라, 절 해라. 절 하자……
고등학생에서 갓 대학생이 되었을 때까지도 귀찮고 번거롭고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그런 일들에서 도망치고 싶기까지 했다. 어머니마저 병을 얻어 아버지 곁에 모시게 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년 만이었다. 어머니조차 없는 포항에는 1년에 한 번 벌초 때나 가볼 뿐 내 고향이라는 인식은 희미했다. 당시 내 머릿속엔 얼마 안 되는 유산을 까먹지 않으려 애쓰면서 대학 공부를 마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소설을 쓰면서 살아지는 데까지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느새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었다. 나도 내년이면 아버지가 세상을 살아 본 만큼은 산 셈이 된다. 그러는 동안 소설가가 됐고 4년 전부터는 대학에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다. 글감을 찾는 습관 때문에 옛이야기에 관심이 깊어졌고 외따로 떨어져 있는 묘에 대한 호기심도 참기 어려울 만큼 커졌다. 그래서 어느날인가 나는 족보를 펼쳐 보았다. 46배판 크기에 900쪽이 넘는 벽돌 책이 다섯 권이나 됐다. 거기서 누군가를 찾아낸다는 건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가 아닐까 싶었다.
족보 읽는 법을 알아보니 뜻밖에 간단했다. 요즘으로 치면 트리 구조의 데이터베이스나 마찬가지여서 사전 뒤지는 것보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증조부 대에 자손을 남기지 않은 분을 찾았다. 묘의 주인은 고조부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내 조부의 입장에서는 막내 삼촌이셨다. 함자는 장(章) 자와 렬(烈) 자. 렬 자는 항렬자이니 그냥 따랐을 테고, 고조부가 막내 아들의 이름으로 고른 글자는 ‘글’을 뜻하는 한자였다. 막내가 모쪼록 공부를 열심히 하길 바랐던 것 같았다. 그런데 네 형들의 이름 봉(鳳), 대(大), 달(達), 성(成) 뒤에 막내의 장(章) 자를 놓고 보니 이름의 기운이 좀 소박해 보이기도 했다.
장손도 아니셨던 조부가 왜 막내 삼촌의 묘를 떠맡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냥 조부의 입장에서는 삼촌의 묘가 부친(나의 증조부)의 묘와 가까운 탓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관례가 내게까지 왔다. 이런 내역을 찾아냈을 땐 좀 억울한 생각도 들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벌초 때 정성을 더 들인다. 지독한 유물론자인 나도 벌초 때만은 조상의 은덕을 좀 보고 싶어지는 것 같다. 집안의 후손 없는 어른의 묘를 돌보는 건 덕을 보면 볼 일이지 해될 일은 아니다.
이 글을 쓰면서 족보를 다시 펼쳐 종증조부의 부분을 읽어 본다. 자(字)는 달수(達秀), 계사년(癸巳年, 1893년) 2월 6일생. 묘는 ‘깊고 복된 산(深福山, 지명이 아닌 걸로 추정)’에 정서를 바라보고(卯坐, 정동을 등지고) 자리해 있다. 부(婦, 아내)는 김해 김씨, 을미년 2월 6일생이고 부친은 성원(成遠), 묘는 합부(合祔, 합장)했다.
이번에 족보를 다시 펼쳐볼 때까지만 해도 종증조부는 혼인도 못하고 혼자 돌아가셔서 묘가 하나뿐인 줄 알았다. 자손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했지 뒤에 적혀 있는 한자들이 기록한 이야기까지 찬찬히 읽어낼 정성은 없었다. 기왕에 합장한 걸 새로이 알게 되었으니 부부의 합장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그리고 시경의 한 구절 해로동혈(偕老同穴)을 얻어 읽기에 이르렀다. 해로는 백년해로할 때의 그 말로, 함께 늙는다는 뜻이고 동혈은 하나의 묘를 쓴다는 뜻이다. 해로동혈 네 글자를 곱씹어 보자니 자식은 없었으나 금슬은 좋았기에 합장이 두 분 생전 의지였다는 쪽으로 결론이 기운다. 무뚝뚝한 경상도 어른들만 보며 자랐는데 종증조부의 삶이 정말 그러했다면 뜻밖의 아름다운 집안 내력이다.
올라가면서 벌초하다 보면 증조부의 묘를 벌초하기 전에 힘이 다 떨어져 잠시 쉬게 된다. 그럴 때면 어른들끼리 꼭 하는 말이 있다. 옛날에는 꼴을 베고 장작을 구하느라 벌초할 게 없었다는 레퍼토리다. 옛날을 살아보지 못한 조카들 들으라고 하는 말인데 우리는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벌초에 따라다니기 시작했던 유년기부터 매해 들었던 소리다. 저 앞산 골짜기 어디쯤 가면 산삼이 널려 있다는 말도,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와 개를 물어가곤 했는데 산길 어디선가 개의 뼈가 발견됐다는 얘기도 들었다. 거기에 덧붙여 숙부는 수해 전에 벌초하다 땡벌에게 스무 방 넘게 쏘인 일도 곁들인다. 도회지 사람 같았으면 큰일이 났을 거라고, 숙부가 그 말을 할 때면 자못 심각해지기도 한다.
벌초 시기에 뉴스에 나오는 사고다. 그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리라곤 예상치 못했는데 당시 직접 목격해서 상당히 깊은 인상이 남아 있다. 숙부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고 묘소에서 벗어나셨는데 그사이 벌침을 스무 방 넘게 맞았던 것이다. 얼른 소변을 봐서 손등 위주로 응급처치하는 장면까지 생생하다. 그 사건 이후부터 숙부는 벌이 있는지 없는지 예의주시한다.
어느 해에는 숙부가 예초기를 내던지듯 내려놓고 내게 달려들어 잡아 끈 일도 있다. 숙부가 작업하던 곳을 돌아보니 벌들이 이제 막 제 집에서 날아올라 우리를 공격할지 말지 간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 일찍 몸을 빼서 화는 면했다. 올해도 이런 저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매번 고개만 끄덕였지 대꾸를 안 하던 내가 말을 얹어봤다.
아마 그렇게 숙부와 문답한 건 올해가 처음이지 싶다. 물으니 대답할 뿐 일부러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투는 아닌데 정답다. 나는 숙부의 이야기를 듣다가 왜 진작 묻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일방적인 추억담으로만 여겼지 그 이야기에 참여해볼 생각을 못 했다. 그런데도 숙부는 조카의 대꾸를 재촉하지 않았다. 묻고 들으면서 그 시절의 풍경과 풍습을 상상해보는 재미도 솔솔했다. 그러는 사이에 바닥났던 기운이 다시 모였고 증조부와 증조모의 묘도 마저 벌초했다.
벌초를 마무리하고 나니 내내 흐리던 하늘에서 해가 나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로 엿보이는 푸른 하늘을 보니 매해 숙제 같고 부담스럽던 일이 올해는 좀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봉분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아직 제법 따가웠는데, 다시 말하지만 지독한 유물론자인 나도 딱 벌초하는 동안만 하늘이 흐려주었던 걸 우연이라고만 여기기는 힘들었다. 우리는 장비를 챙겨 아버지와 어머니 모신 아랫자리로 내려와 한꺼번에 성묘했다. 나는 이번에 느낀 이런저런 소감을 되새기며 선산을 향해 절할 때마다 작년보다 조금 더 깊이 몸을 숙였고 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설가.
1979년 경북 포항 출생.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전복」이 당선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급소』, 『사이드미러』와 장편소설 『캐스팅』이 있다.
제23회 한무숙문학상 수상.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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