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집에는 아직 내 방이 있다. 아무 때고 다녀가니까 당연한 말일 것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 내 집에 어머니의 방은 없다.
그곳에 있는 내 방에는 어머니의 김치냉장고와 나의 프린터가 나란하다. 처음에는 김치냉장고의 위치를 부엌이나 베란다로 어떻게든 옮겨보려 했으나 이제는 출력되는 문서들을 바라보면서 냉장고에 미리 넣어두었던 사이다 같은 것을 익숙하게 꺼내 마신다. 그러다 골똘히 생각해본다. 그곳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여야 한다면 어쩌면 그건 내가 아니라 냉장고가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매일 어머니의 삶과 함께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냉장고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자주, 매우 친밀한 침입자가 되어 어머니의 집에 가곤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는 혼자 그 집에서 예기치못한 상태로 오후를 맞이할 때다. 거실에서 이것저것 하고 있으면 순식간에 오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올 때가 있다. 창을 통과한 빛이 거실 바닥에 테두리를 만들어놓으면 나는 그 빛이 조금씩 자리를 옮기다 결국 사라져버릴 때까지 바라보곤 한다. 다 사라졌군, 하고 시계를 올려다보면 계절마다 그 시간은 거의 일정하고 느닷없는 슬픔과 조우하여 만신창이가 된다. 되었다가 돌아온다. 돌아왔기에 다른 일을 한다. 나는 보통 무언가를 바라본다. 무언가가 지나간 공간을 얼마간 바라본다. 그러다 이른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어머니가 퇴근을 한다.
어머니의 말에 나는 채소를 다듬다 말고 내 방으로 간다. 방에 붙은 작은 베란다 문을 연다.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는 나뭇잎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잎이 얇고 뾰족하지만 연하고 부드러웠던 그 나무를 좋아했었다.
어머니가 말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려다보이는 놀이터도 공사 중이다. 고무 바닥재를 교체하려는 듯 다 뜯어진 채다. 시설물들의 벽면마다 파도가 그려져있던 이 놀이터의 이름은 바다 놀이터였다.
다 어디론가 자기 자릴 찾아가고, 베란다에는 책장 하나와 굵은 소금 항아리와 빈 의자만 하나 있다. 나는 의자에 앉는다. 의자를 끌어와 책장 앞으로 간다. 내가 이십이 년 전부터 읽었던 책들의 책등을 바라본다. 이제는 폐간된 문예지와 수십 권의 만화책들. 열리지 않는 서랍 두 개.
어머니가 말한다. 무언가를 버린 것도 어머니고, 무언가를 버리지 않은 것도 어머니다. 나는 어머니가 버리지 않은 것들이 왜 다 내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니까 늘 중요한 것을 놓치는 거야. 아주 오랫동안 내게 이렇게 말해왔던 사람이 있었지만 두 달 전 그만 숨을 거두었다. 나도 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 왜 다 내 것인지, 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지만.
생각을 멈추고 다시 채소 손질을 시작할 때 어머니는 바느질을 시작한다. 슬픔은 언제나 아주 사소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나는 그 마음과 씨름한다. 세탁소에 맡기지 그랬느냐고 묻자, 내일 바로 입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나도 그 편의점 주인을 본 적 있다. 아침에도 오후에도 밤에도 본 적 있다. 어느 시간에 가든 한결같은 웃음을 짓고 소소한 일상의 안부를 묻고 가끔은 작은 농담도 건네는 모습을. 부모를 너무 좋아하고 따르는 것 같은 두 명의 아이들을. 그 아이들과 파라솔에서 밥을 먹다가 손님을 맞고 다시 돌아와 둘을 끌어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을. 소중함은 늘 너무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나는 서둘러 그 마음을 붙잡는다. 칠 년 전 평범했던 어느 여름날에 내가 송두리째 잃어버렸던 것. 아무래도 영원히 위험할 것 같다는 전조에 대해서.
열 개 정도 꿈을 꾸고 나니 다음 날이 도착해 있다. 다섯 개쯤은 매우 나쁜 꿈, 다섯 개쯤은 일상적인 꿈이다. 일상적인 꿈이란 건 매우 좋은 꿈이라는 의미다. 일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적 있기에 환상적이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꿈에서 난 불은 그냥 두었어야 했을까?
내 방문 앞에는 낡은 소화기 한 대가 놓여 있다. 어머니는 전날 내게 사용기한이 지난 소화기를 새 소화기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관리사무소는 걸어서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봄에 개가 죽고 난 뒤로는 혼자서 가까운 곳에 가는 것도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 재활용이라든지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떨어져가는 설탕이나 우유, 두부를 사러 갈 때도 늘 함께였기 때문이다.
가장 커다란 슬픔은 때로 가장 사소한 것임을 알기에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이음새 부분이 녹슨 소화기를 들고 관리사무소에 간다. 그러다 나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머니가 설명해준 대로 가 본 곳엔 노인정이 있다. 나는 일단 문을 밀고 들어간다. 한쪽 벽면의 책장에 꽂힌 책들은 책등이 전부 빛바래 있다. 한 권을 꺼내 펼쳐보니 오래된 책 냄새가 났지만 멀쩡했다. 다른 한쪽엔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그 안쪽엔 적당해 보이는 크기의 방이 있다. 대여섯 명의 노인들이 무릎에 담요를 덮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 보인다. 거기 들어갈 생각은 못하고 나오려 하는데, 세 사람이 문을 밀고 들어온다. 나는 얼른 묻는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말한다.
나는 그를 따라간다. 노인정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뒤 두 방향의 계단 중 한 방향의 계단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얼마간 걷는다. 원래 화단이었을 것 같은 공간에 소화기들이 모여 있다. 어림잡아도 오백 개가 넘을 것 같아 보인다. 아니 천 개? 사진을 찍어둔다. 그런 광경은 처음 보았기에.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기에.
낡은 소화기를 들고 있으니까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는 듯하다. 나는 어머니의 동과 호수를 말한다.
그러나 집에 새 소화기는 없었고 나는 어머니와 확인 전화를 하고 다시 상황을 설명한다. 사무실 직원은 우리 동을 담당한 관리자와 통화를 한 뒤 일단 새 소화기를 주겠다고 한다. 나는 낡은 소화기를 반납하고 서명란에 서명을 하고 길고 깨끗한 새 소화기를 받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것을 있어야 할 위치에 둔다. 한낮의 빛이 아직 집안으로 들이치기 전이다. 가방을 챙겨 어머니의 집을 나선다. 저녁에 다시 돌아올 것처럼 문을 닫는다. 문은 무겁고 따뜻하여 닫는 데 오래 걸린다.
문은 내 슬픔의 무게와 온도를 알고 있다. 어쩌면 문을 닫는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을 일. 일상이 아니라 환상.
'일상을 환상이라고 여기게 되었거나 오늘 하루가 있었다'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겪었다'라고 말한 사람은 최소 열 한 명. 나는 그 열 한 명에게 편지를 받은 적이 있고 나는 그 편지에 답신을 보내는 마음으로, 휘발되고 말 것들과 피할 수 없는 슬픔과 김치냉장고와 프린터가 아닌 김치냉장고와 프린터와 베란다와 고무 바닥재, 편의점 주인과 노인정의 세 사람과 새 소화기를 둘러싼 것들을 적어 내려간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거기에 쓴다. 그것들은 어쩐지 영원하다는 속성이 있으므로 말로는 불가능하나 다른 방식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칠 년 전 그날 그때 그곳에 무언가를 두고 왔고 그것을 되찾아야 하기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고 말았고 어느 밤 비가 내리면 마침내 내가 혼자 장례를 치를 거라는 전조를 느꼈기에. 어떤 글의 결말은 당위보다는 진실에 가까울 것이기에 매일 조금씩, 어느 날은 하루 종일 그렇게 한다.
소설가.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별일은 없고요?》, 장편 소설 《수면 아래》, 중편 소설 《해피 엔드》, 《어느 날의 나》, 짧은 소설 《좋아 보여서 다행》, 단편 소설 《그때는》 등을 썼고, 제25회 김준성문학상, 제26회 가톨릭문학상 신인상, 제10회 젊은작가상, 제19회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