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히말랴야에 대한 글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작년 가을 나는 히말라야 등지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인도의 라다크라는 지역이었는데 그곳에서 여러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보았다.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산맥의 골에 눈이 쌓인 풍경이었다. 산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느 시야에서도 설산을 볼 수 있었다. 차를 타고 가면 계속해서 그 광활한 산맥 아래에 작은 집과, 작은 인간, 작은 동물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처음에 내가 히말라야에 간다고 했을 때 지인들은 대부분 걱정과 응원을 동시에 했다. 그리고 내게 어떤 문학적인 체험을 겪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돌아와서는 그걸 글로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도 그것에 대해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돌아와서도 아직 히말라야에 대해 쓰지 못했다. 쓰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쓰려고 할 때마다 쓸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왜 쓰지 못했는지에 대해 생각했고 쓸 필요가 없어서 쓰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나는 점점 그곳을 잊기까지 했다. 거기에서 분명 무엇을 본 것 같은데 뭐였을까.
말할 수 없음에 대해서 써본다. 그들은 그렇게 훌륭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고, 그들은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었고 나도 잠시 그곳에 떨어졌었고 아주 가끔은 나도 그 풍경이 되었던 것도 같고. 그렇기에 아마도 말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누군가 나에게 그것에 대해 왜 말하지 못하는 거냐고 한다면 나는 그냥... 이라고 말할 것만 같고 집에 돌아오며 왜 그때 그들에게 그것에 대해 말해주지 않은 거야? 라고 내 자신에게 묻는다면, 그건 비밀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내게 문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말하고 싶지 않음”의 상태이다. 그럼에도 나는 히말라야에 대한 글을 쓸 수도 있다. 물론 이 글이 유일하게 내가 쓴 히말라야에 대한 글이 된다면 좋겠지만, 아니 좋을 것은 딱히 없지만, 히말라야에 관한 글에 관한 글이 된다면 좋을 것이고, 그런 식으로 내가 메타를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나는 메타를 쓸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면 메타에 대해서 내가 쓸 수 없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만이 메타를 쓸 수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글은 일종의 그런 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늘 조금 말하고 조금 걷고 조금 생각하고 조금 잠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무 많이 말해버리고 너무 많이 걸으며 생각하고 너무 많이 잠들어버린다.
내게는 그 일을 직접 겪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백 번을 말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원초적이고 낭설과 같은 믿음이 아직 남아있고, 그러나 글쓰기란 그것에 대해 굳이 이야기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역시 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일에 대한 글은 앞으로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면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왜 말하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말하고 싶지 않다고 다시 대답할 수 있겠고, 다시 집요한 이가 내게 묻는다면 (혹은 내 자신이) 나는 괴로운 듯 떠듬떠듬 무언가를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그것과 전혀 상관없지만, 사실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에서 가장 말할 수 있었던 문장 중 하나를 꺼내서 당신에게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받은 당신은 이게 대체 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시의 첫 문장을 시작해 볼 수도 있다.
사진: Unsplash의 LOGAN WEAVER | @LGNWVR
쓸 수 없음에 대해 써보자. 그럼에도 무언가를 써야할 것 같다는 생각은 아마도 착각이다. 써야할 것 같다는 문장 앞에 붙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사기꾼이며 협잡이고 모사일 뿐이다. 나는 쓰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가며 내 일상은 어떤 글쓰기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게 ‘쓸 수 없음’의 상태는 무언가 이상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상태를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드가는 어느 날 말라르메에게 시를 쓰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 어떤 것도 쓰지 못했다고 말한다. 말라르메는 이렇게 답한다. “하지만 드가, 시는 생각이 아니라 단어로 만드는 거라네.” 예전에 나는 시에 ‘물새떼가 난다’ 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나는 한 번도 물새떼가 나는 걸 실제로 본 일은 없거니와 그 단어가 마음에 들어 그저 그렇게 썼다. 그리고 올해 초 탐조를 갔다가 물새떼를 실제로 만난 적이 있었다.
이전에 썼던 문장을 실제로 겪게 되는 일은 그렇게 희귀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선험이라는 단어처럼, 인간의 무의식 저변에서 떠오른 기억이 실제로 발화 기관을 통해 뱉어지거나 손을 통해 적혀지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 그리고 그 뒤에 내가 썼던 것을 예언이라도 한 듯 실제로 만나게 되는 일에 대해서. 그러나 실제로 만난 물새떼는 내가 생각했던 단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물새는 본 적이 있어도 물새떼는 처음이었고 새 떼는 본 적이 있어도 물에 사는 새가 떼 지어 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물과 새와 떼라는 단어가 합쳐지자 그것은 물새떼라는 단어가 되었다. 물새떼라는 단어가 호숫가를 박차고 날아갈 때 폭풍이 치듯 물 수면이 요동쳤다. 그 소리는 천둥 우레 같았고,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처럼 새까맸고 그 단어의 비행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오래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도무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단어로 시로 쓴 것을 후회했다. 그렇게 밖에 쓸 수 없었다는 것을, 내가 더는 노력할 수 없는 상황과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해. 물새떼에 관한 얘기만은 아니다. 나의 노력과 선의와 불의, 타인의 사정과 마음에 대해, 사후에 대해, 내가 쓸 수 없었지만 쓴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야 했지만 말했던 것에 대해, 쓰지 말아야 했지만 썼던 것에 대해, 쓸 수 없었지만 썼다. 대부분 그렇게 썼다.
만약 써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싶다. 그런 이야기는 희망차고 아름다우니까. 사람들은 미래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결국엔 잘 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렇다. 결국에 주저앉았고, 망해버렸다고 하는 작품은 사람들에게 당혹이나 절망을 주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미래가 뭔지 나는 알 수 없다. 나에게도 그런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겠지만 사람들에게 쉽게 답할 수 없어서 그만두었던 것 같다. 미래에 대해 사람들이 원하는 두 가지의 답변은 좋음이나 싫음의 영역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이제 그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알 수 없다’ 라고 한다. 그리고 ‘쓸 수 없다’ 라고 한다. 말할 수 없음. 알 수 없음. 쓸 수 없음. 그럼에도 그것에 대해 말하려면 변명을 해야 할 것 같다. 길고 지루한 변명을. 나는 그렇게 시의 첫 문장을 시작해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