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킴이 아르바이트
나는 재작년까지 2년 동안 한 전시장의 지킴이로 일했다. 2년 차에는 도슨트로 직함이 변경되었지만, 주로 하는 일은 반지하의 한 평짜리 사무실에 앉아 있고, 방문객들이 오면 인사를 하고, 주의 사항을 숙지시키고, 전시에 관해 물어보는 것들이 있으면 대답해주고, 전시장에서 만든 책과 천 가방을 팔고, 진행 중인 전시의 작가들이 방문하면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작가들과 친해지는 일은 물론 전시장에서 시킨 일은 아니고, 나도 분야는 달랐지만 예술가였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을 알아두고 싶어 자발적으로 한 일이다. 전시를 하는 작가들에게 미술에 관해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영상이 있으면 내 노트북을 켜서 같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나의 시를 궁금해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파일을 보내주고, 영미권에서 살다 온 작가에게는 내가 쓴 시를 해외 공모전에 투고할 때 번역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렇게 회상하고 나니, 손님이 하루에 서른 명 남짓하게 오는 전시장에서 지루할 수밖에 없는 지킴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회만 되면 나의 본업에 필요한 기회를 쏙쏙 빼먹은 거 아닌가 하는 멋쩍은 미안함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늘은 내가 그곳에서 받게 된 가장 큰 도움에 관해 얘기해 보려 한다. 그건 전시장에서 전시한 작가가 나의 첫 시집의 표지 그림으로 자신의 작품을 쓰도록 허락해 준 일이다.
Be Careful What you Wish For
그 전시는 2024년 8월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종로구 창성동에 있는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열렸던 정아롱 작가의 개인전이다.
이 문구는 미국의 격언으로, 자신의 소원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도 있으니, 소원을 빌 때 조심하라는 뜻이다. 마감이 너무 많이 밀려서 여러 편의 글을 써야 하는 작가가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아도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고 생각해보자.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그는 백수가 될 것이고, 글을 발표할 수 없다는 우울감에 빠져 불행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Be Careful What You Wish For≫ 전시 전경,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4.
Fac Fortia Et Patere, Vincit Qui Paritur, egg tempera 24k gold leaf on wood, 2 panels, each panel 23x16x2.5cm
광선이 이어져 있는데, 광선을 따라 대각선으로 올라가면 컴컴한 구름이 있다. 구름으로부터 불을 보존하라는 계시를 받은 듯하다. 이 장면이 떠올리게 하는 건 물론 구약 성서의 프로메테우스 설화다. 그는 인류의 삶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불을 신으로부터 훔쳐내지만, 그 절도의 대가로 평생 언덕에 묶여 독수리들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는다. 이 그림 속의 여자아이도 그렇게 될까? 이 나무로 된 책의 옆면에는 라틴어로 한쪽에는 “fac fortia et patere”, 한쪽에는 “vincit qui paritur”라고 적혀 있다. 첫 번째 문구는 ‘용기 있는 일을 하고 견뎌라.’ 두 번째는 ‘견디는 자가 지배한다’는 뜻이다.
이 라틴어의 뜻은 모두 작가가 전시장에 찾아온 날 내게 설명해준 것들이다. 큐레이터 선생님들은 작가의 작품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했던 것 같다. 작가가 이 전시의 작품들을 만들면서 많은 레퍼런스를 들여왔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시인인 지킴이가 도슨트 역할을 해줄 거라며 작가를 내게 보냈다. 띄엄띄엄, 한 자 한 자 눌러 말하며, 마치 나무책에 글자를 압인하듯이 자신의 의도와 창작 배경을 설명해주던 작가의 모습이 선연하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했던 일들과 성경 속에 언어로만 존재하는 일화들을 유비하며, 삶과 맞아떨어지는 장면들을 직접 그려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원형(archetype)을 마주하고 통합하며 개인으로서 거듭난다’고 말했던 칼 융의 분석심리학을 참조하여,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원형들을 독립적으로 고안해냈다. 투사(Fighter). 산책자(Stroller). 추락자(Faller). 기원자(Wisher). 수용자(Receiver). 수여자(Giver). 그리고 은둔자(Caver).
Archetype for Self Realization 연작, 2024, silver point on cotton paper, 29x21cm
내가 이 전시를 좋아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경 속의 구절과 분석심리학의 ‘원형’이라는 육중한 상징체계 앞에서도, 작가가 자신의 역사와 삶을 그것들과 동등히 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밝히기 위해서 성경과 성화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 아니며, 분석심리학에 동의하기 때문에 융의 원형 개념을 참조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성경’과 ‘원형’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작품들의 장면 속 주인공은 주로 작가 자신(자화상)이다. 그러나 작가가 빌려온 세계와 형식 속에서 그들은 조금은 다른 인물이 된다. 그 인물들은 이단화와 삼단화의 나무 패널 속에, 또한 중세 시대에 널리 사용된 ‘에그 템페라’(색소를 계란 노른자에 섞어 만든 물감)로 그려지고, 존재한다. 작가 자신이 고안한 원형의 이미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즐겨 썼던, 은으로 된 펜촉(실버포인트)으로 소묘된다.
이 작품들에서 나르시시즘의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차용된 세계에 대한 ‘헌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시장의 작품들을 처음 둘러보았을 때, 나는 이것들이 어떤 방식과 과정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지금 이 시대에 조각되고 그려진 작품들이지만,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느끼게 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전시를 만드는 데 통상적으로 쓰이는 시간보다 물리적으로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들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는데, 작가는 실제로 삼단화의 캔버스가 된 나무를 오랜 시간 직접 파내어 화폭을 만들었고, 시판되지 않는 템페라 물감을 제조하는 등, 중세의 방식과 동일하게 작업하였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바, 이 오랜 작업의 과정을 축약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작업의 기다란 시간은 ‘성화’를 조각하고 그림으로써 신에게 다가가는 고행과 다름없었기 때문, 이 긴 시간 자체가 작업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전시를 다 보고 나서 우리는 다시금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제목의 뜻은 전시된 작품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나는 작가가 이렇게 말해주던 걸 기억한다.
The Synchronicity Cloud : Surrender, 2024, oil on linen, 31.8x40.9cm
구름이 모여 이루는 글자. 이 모티프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로베르토 볼라뇨의 『먼 별』에 나오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댈러웨이 부인이 꽃을 사러 나온 런던 거리에서 시민들은 비행기가 하늘에 그리는 글씨를 바라본다. 어떤 글자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힌다. <먼 별>의 주인공 카를로스 비더는 낮에는 아름다운 시를 쓰고, 밤에는 독재 정권에 부역하며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다. 그가 비행기를 몰아 허공에 쓰는 글자는
이다음에 그려지는 글자는 이렇다.
의미를 담지하는 글자가 자연의 산물인 구름의 옷을 입고 등장할 때, 그것은 정확한 메시지라기보다는 하늘이 주는 계시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서 구름들이 이루는 글자는 “surrender”(복종하라)다. 성경 속 하느님의 명령이자 신도들의 실천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작가는 이 전시를 만들기 전까지, 인생에서 자신의 삶이 가장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복무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대상이 꼭 신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이것이 만약 작가의 소원이라면, 그는 이 소원을 바라는 동시에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를 또한 조심하고 있지 않았을까?
Release of Ego, 2024, egg tempera and 24k gold leaf on epoxy molding compound, 15.6×14.5cm
제목이 ‘에고의 해방’인 이 작품에서, ‘에고’라고 명시적으로 쓰인 금박의 연기는 인간의 입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다. 물론 이것은 위에서 말한 복종의 과정을 담은 장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에고가 금박으로 덮여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에고는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것은 작가에게 중요한 것이었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의 ‘그 모든 것’에 포함된다. 어쩌면 작가는 에고에 금박을 덮어줌으로써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그것은 빠져나간다. 에고가 빠져나간다면, 작가는 자신의 삶과 역사를 성경의 구절과 융의 원형들과 대등하게 놓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러한 대등함과 작가적 자의식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까? 소원에의 헌신 그리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지금까지 갖고 있던 것들마저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 자아와 소원이 길항하고 교차하는 순간의 긴장감을 나는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숲에서>와 『유원지 왔니?』
In the Wood, 2024, oil on linen, 3 pieces, overall: 162x391cm
『유원지 왔니?』의 표지
중세 시대의 기법을 따른 작품들 외에도 전시에는 유화 작품도 있었다. 작가가 이전부터 작업해 오던 ‘숲 연작’에 해당하는 작품들이었다. 이 중 내 시집의 표지 그림이 된 <숲에서>는, 작고 빛나는 토템 같은 전시장의 다른 회화 작품과 달리, 스무 걸음 정도의 길이가 되는 벽을 모조리 채우고 있었다. 커다란 캔버스 세 개를 이어 붙인 작품이었다. 이곳에는 자화상이 없고, 성경 속 일화가 반영되지 않는다. 잿빛, 녹빛, 하늘빛을 담은 울창한 숲을 그린 작품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중앙부에 있는 유령의 얼굴들이다. 그들을 유령이라 칭해보는 건, 숲의 색과 형태 속에서 투명 망토를 쓴 듯 그들 얼굴의 두께감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숲의 아래쪽에는 잿빛의 민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닌다. 숲의 왼쪽에는 나무 대신 의미심장한 엑스 자 마크가 그려져 있다. 이 표시가 무엇인지 첨언하자면 이것은 이전의 숲 연작부터 이어져 오는 ‘마녀가 있었던 자리’다. 마지막으로 울창한 숲이 덮지 못하는 허공에는 회색의 구름이 떠 있다. 그것들은 위에서 언급했던 작품 <Surrender>에서 뭉게뭉게 부유하는 듯한 구름과 달리, 단단하고 각진 돌처럼 보인다. 어쩌면 물을 길어가는 소녀의 뒤통수에 광선을 쏘고 있는 구름처럼, 외계 비행체의 분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숲에서>도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작가는 숲이 살아 있다고 믿으며, 숲이 초대한 인간이 다시금 숲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었다. 마녀와 물고기와 유령이 사는 숲. 나는 이 숲의 살아 있음이 내가 첫 시집 『유원지 왔니?』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바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유원지 왔니?”라는 문장 속의 단어 ‘유원지’는 놀이공원, 아케이드와 달리 강이나 산 같은 자연 속에서 노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유원지 왔니?”라는 물음에는 ‘놀러 올 만한 곳이 아닌 여기에 놀러 온 것처럼 군다’는 빈정거림이 들어있다. 정아롱의 <숲에서>에서, 숲을 살아 있게 하는 동시에 으스스한 것으로 만드는 주체들 중 유령이, 이 시집을 처음 만난 이들에게 “유원지 왔니?”라고 아이러니하게 묻는 형국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화폭에서 중앙에 해당하는 부분만 잘라내어 표지로 쓴 것도 유령의 존재감을 부각하고 싶은 의도였다.
작년 말 나의 첫 시집이 나왔다. 여러 번의 반려와 기다림 끝에. 내게는 책 한 권 이상의 이미가 있었기에 출간 파티를 열기도 했었다. 그곳에도, 시집의 첫 낭독회에도 자신의 작품을 내준 작가는 찾아와 주었다. 전시장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는 첫 시집을 투고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하던, 많이 불안하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그곳에서 전시하는 작가들과, 또 그곳에 찾아오는 작가들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지금 그 일터에 관해 떠오르는 것들은 이렇다. 대부분의 시간에 홀로 앉아 휴대폰을 만지다가, 위층의 화장실에 누군가 들어가면 얼마 후 물이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느꼈던 외로움, 작가와 손님들을 맞이하며 설레고, 재밌고, 부럽고, 외롭지 않았던 순간이다. 나는 이곳에서 일하며 내가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이 전시를 지킬 때는 비록 아르바이트생이었지만 아름다운 전시를 열고 있는 곳에서 일한다는 소속감과 약간의 자랑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가끔 전시장을 빠져나와 통인시장에 떡볶이를 먹으러 가거나 다른 전시장과 서점에 구경을 가기도 해서, 이제 와 선생님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전시를 지키던 때 나는 광주비엔날레에 놀러 가기도 했는데, 미술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기록한 짧은 시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제목은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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