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언어를 글로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평생 지휘, 합창으로 음악을 다뤄온 필자에게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담담히 나의 음악 인생을 바꾼 두 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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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봄, 필자가 독일 유학을 막 시작하던 해의 일이었다. 재학 중이던 만하임 근교의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장이 위치한 슈베칭엔 성의 로코코 극장에서는 작곡가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식> 공연이 있었다.
200석 남짓의 오페라 극장이 전석 매진되어 별 기대 없이 '표 구함'이라고 쓴 종이를 들고 하염없이 기다리다 지쳐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르렀을 때 공연 직전, 갑자기 객석으로 향한 문이 열리더니 공연 관계자로 보이는 한 분이 나오셔서 종이를 들고 있는 날 보시곤 조금 불편한 좌석이라도 괜찮겠냐고 물어오셨다. 난 "물론이죠!" 하고 얼른 답변을 드리고 그것도 공짜(!)로 급히 극장 객석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녹화용 방송 카메라 바로 앞이라 공연 내내 객석에 거의 눕듯이 공연을 보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지만 처음 접하는 바로크 오페라의 매력에 커다란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했던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당시 지휘자는 무려 오늘날 고음악 전문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있는 카운터 테너 출신의 ‘르네 야콥’이었다!
1980년대, 현대음악의 난해함(혹자는 음률의 폐수라고 언급했던) 속에 음대를 다녔던 필자에게 90년 초반에 직관했던 단 한 번의 바로크 오페라 실연 감상은 필자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이후로 필자는 바로크 음악의 매력에 빠져서 귀국 후, 아직 정격 음악 연주에 관심이 많지 않던 시대에 헨델의 메시아는 물론 바흐의 수난곡들과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전곡 등 대규모 바로크 작품들을 시대 악기를 사용하여 또한 그 시대의 연주 관습을 이용하여 연주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한 번의 멋진 연주를 감상했던 행운이 필자의 음악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르네 야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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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1981년 겨울 즈음,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독일의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헨델의 메시아> 내한 공연이 있었다. 당시에 이제까지 경험했던 수많은 메시아 연주와는 전혀 다른 연주를 접하면서 다양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연주회 프로그램 북에 깨알같이 그 질문들을 적어놓은 책자를 지금도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대규모 합창에 익숙해져 있던 그 유명한 할렐루야 합창곡의 시작 부분은 당연히 우렁차게 시작할 것을 기대했는데 너무나 가볍게 소규모의 앙상블로 시작하였다. 아직 악기가 들어있는 총보를 가지고 있지 않던 필자는 큰 의문을 갖게 되었다. 왜 저렇게 소규모로 작고 여리게 시작하는 것일까? 또한 피치가 우리가 알고 있던 피치와는 다르게 거의 반음 밑으로 조율되어 있었고 당시 국내 무대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이동식 소형 파이프 오르간(포지티브 오르간)도 처음 구경할 수 있었다. 당시 메시아 연주라면 연말에 수백 명의 합창단원과 모차르트가 편곡한 고전 시대 악기들이 함께 하는 대규모 편성의 메시아 대연주회에 익숙해 있었던 필자에게 이 연주는 무엇인가 다름을 각인시켜 주고 무엇이 이렇게 다른 음악, 다른 음향의 세계를 만드는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는 계기가 되었다.
헨델의메시야_뮌헨오케스트라_CD앨범
이후 정식으로 지휘 공부를 시작하면서 당시에 활발한 논의가 시작된 시대 연주, 정격 연주 등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이어진 90년대의 유럽에서의 공부는 시대별 연주 관습(HIP/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에 대한 관계 서적의 번역과 이를 반영한 연주들로 이어지고 30여 년이 지난 이제는 바로크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여러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창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잘 준비된 의미 있는 좋은 연주나 공연은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일생의 큰 계기가 되고 발전적인 변화의 모멘텀을 이루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좋은 연주나 공연 그리고 전시회에 대한 관심을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가져가고 이에 대한 바람직한 후원 방법을 모색해야 되는 이유인 것이다.
제3, 제4의 에피소드를 기대해 본다.
이상훈 지휘자 소개
글. 이상훈
서울음대 및 동대학원 졸업
독일 만하임음대 대학원 졸업
(오케스트라지휘, 합창지휘 전공)
독일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데뷔
前 국립합창단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
前 부천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
前 성남시립합창단 전임지휘자
現 한국합창총연합회 선임이사
現 한국합창지휘자협회 상임이사
現 국립합창단 OB 지휘자
現 미가엘선교합창단 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