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친정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마도 클래식 음악을 업으로 삼은 내 삶이 녹록지 않아 보이셨던 모양이다. 사실 나도 음악으로 밥벌이해야 하는 순간부터 내 전공이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인지 절감했다. 그래서 나는 진짜로 내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둘째 아이는 두 달 정도 피아노 학원에 다녔는데, 아이의 재능이 느껴지는 순간, 곧장 학원을 끊어버렸다. 그 시간에 좀 더 ‘쓸모’ 있는 것을 배우게 하고 싶었다.
수개월 전 미국 음악대학 수업을 참관하러 출장을 갔다. 마칭 밴드(Marching Band)라는 수업을 참관하려고 했더니, 관계자가 캠퍼스에서 한참 떨어진 필드로 나를 안내했다. 수업 시작 5분전 수백 명의 학생들이 땡볕에 서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스트레칭하고 있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자, 학생들이 자기 몸집만 한 쇳덩어리 악기를 하나씩 등에 메더니 대열에 맞추어 힘차게 춤을 추며 행진하고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며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압도적인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시간… 2시간….가만히 앉아 구경하기에도 무덥고 진이 빠지는 땡볕에서 참관하다 보니, 점점 궁금해졌다.
‘도대체 몇 학점짜리 수업인데 이렇게 중노동을 하나?’
‘1주에 3시간짜리 수업이면 좀 나눠서 하지 왜 이렇게 힘든 걸 3시간이나 연속강의로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 이 학생들은 이런 수업을 도대체 왜 듣는 건가?’
‘전공 필수로 이런 걸 시키나? 이런 걸 하면 전액 장학금이라도 주나?’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담당 교수에게 가서 대답을 들었다. 그의 대답은 하나같이 기가 막혔다.
“이 수업은 딱 1학점짜리 수업이고, 3시간 연속 강의를 하는 이유는 이렇게 3시간씩 주 4회, 다시 말하면 1주일에 12시간을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며, 이 아이들은 대부분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수업은 필수 수업이 아니고, 학생들이 그저 듣고 싶어서 듣는 수업이다. 장학금은 이 300명의 아이 중에 선두에 서는 댄서 한 명과 조교 역할을 하는 2명에게만 지급된다. 다른 학생들은 전원 수업료를 내고 듣는 수업이다.”
참관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 무엇보다, 미국의 교육이 부러웠다. 저런 강렬한 열정과 터져 나오는 듯한 활력과 햇살 같은 밝음을 과연 내가 단 한 번이라도 한국의 수업에서 본 적이 있던가…젊은 시절에 무언가에 저만큼의 에너지를 가지고 열정을 쏟아내 본 학생들은 세상에 나가서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학생들이 학창 시절에 경험해 봐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저런 열정이 아닐까? 그리고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왜 미국 교육에서는 되는 것이 한국에서는 안 되는 것일까?’
‘주당 12시간을 출석하고 1학점을 받는 수업을 개설한다면, 한국의 대학에서 그 수업이 폐강을 면할 수나 있을까?’
‘한국의 교육에서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는 아이들이 하루에 3시간씩이나 연습을 해서 무슨 쓸모가 있을까?’
출장 후 당시의 기억을 수없이 떠올리면서, 나는 그 “쓸모없음”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환희와 열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우리의 교육은 ‘쓸모’에 함몰되어 있다. 어린 학생들이 지난한 선행학습을 견디는 것은 그것이 중고등 시기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고, 중고등학교 때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것이 대학 입학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은 그것이 좋은 직장을 구하기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고, 좋은 직장을 구하려는 것은 그것이 좀 더 편안한 삶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쓸모’란 미래를 염두에 둔 말이다. 그래서 나도 내 아이들이 피아노보다는 ‘쓸모 있는’ 것을 배웠으면 했나 보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이 “쓸모없는 것”만이 일으킬 수 있는 강렬한 열정을 이 아이들의 삶에서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래를 위한 ‘쓸모’를 향하느라, 온 마음을 다해 현재를 살아내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는 “무관심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대상의 유용함이나 효용성에 대한 관심 없이, 자신의 욕구나 이해관계를 배제한 순수한 태도를 뜻하는 개념이다. 칸트는 이런 상태에서만 제대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만약 마칭 밴드 수업이 한국의 관점에서 “쓸모있는” 수업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학생들이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좀 더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땡볕에서 중노동을 하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리허설을 하는 학생들의 마음도, 그것을 관찰하는 내가 느낀 감정도, 당시의 그것과는 달랐으리라. 칸트의 말대로, “쓸모없는 것”은 “쓸모있는 것”이 도무지 만들어낼 수 없는 감정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예술의 가치가 있다.
둘째 아이가 파헬벨의 캐논을 직접 쳐보고 싶다고 한다. 아이가 인쇄해 온 낱장의 악보에 손가락 번호를 써주고 손 모양과 프레이징과 셈여림을 설명해 주며 공들여 가르쳐 본다. 오늘의 삶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것, 세상에 그보다 쓸모있는 것이 과연 몇이나 되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김덕희 소설가 소개
글. 허효정
피아니스트, 음악학자.
서울대 기악과⋅미학과 최우등 졸업, 서울대 피아노 전공 석사,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칼리지 종교음악⋅피아노 석사, 인디애나 대학(블루밍턴) 연주자 디플로마, 위스컨신 주립대 합창지휘 석사, 서울대학교 서양음악학 박사, 위스컨신 주립대 피아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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