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뵈뵈아트 'Think' 섹션의 기고 요청을 받고, 모니터 앞에서 화면 가득 다가오는 질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
고심(Think) 끝에 도달한 결론은 결국 내가 평생을 함께해 온 '연극'이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풀기 힘든 이 오랜 질문을 이제 제 스스로에게 다시 던져봅니다.
01
외면에 치우쳤던 새파란 청춘, 그리고 반전의 서막
이제 와 고백하건대, 젊고 새파랗던 20대의 저는 직접 경험은 물론 책을 통한 간접경험조차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치기 어린 마음으로 연극을 시작했던지라, 연극에 대한 절박한 성찰이나 고찰은 부재했습니다. 오직 스스로의 성취감과 우월감에 젖어 무대에 올랐던 기억이 고개를 듭니다. 배역의 깊은 내면 속으로 파고들어 인간의 욕망과 아픔, 상실 같은 자아를 분석하기보다, 그저 겉으로 드러난 외면에 치우쳐 연기하기 급급했던 그 시절이 못내 부끄러워집니다.
사실 학창 시절의 저는 공부보다 음악에 미쳐 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룹사운드와 헤비메탈에 매료되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음악 연습실을 마련해 학교생활보다 더 열정적으로 매달렸습니다. 대학 진학 역시 부모님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in 서울'을 하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전기와 후기 대학에 모두 낙방한 후 마지막으로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지금의 서울예술대학교(구,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82학번)였습니다.
대학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음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학교보다는 음주와 연습실을 전전했고, 성적은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러다 2학년 졸업작품 뮤지컬 <가스펠>에 참여하며 비로소 연극의 진짜 매력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제 인생을 완전히 뒤바꾼 일대 사건은 졸업작품 때 찾아왔습니다. 동기들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Our Town)>에서 남자 주인공 '조지' 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우려와 달리 졸업작품 발표가 끝난 후, 당시 학장이셨던 유덕형 선생님으로부터 "몇십 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졸업생"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짜릿한 반전이자, 연극배우로서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02
고통 어린 성찰이 삶을 예술로 바꾼다
그러나 인생은 한마디 칭찬대로 흘러가 주는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연극 인생 역시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화술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는 며칠 밤을 새우며 눈물로 대사를 고쳐 잡았고, 인물을 분석하기 위해 온전히 그 인물로 화(化)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내기도 했습니다. 오직 연극을 위해 숨 쉬고 살아왔던 그 고단한 나날들이 쌓이고 나서야, 비로소 제 인생이라는 연극은 충실해졌습니다. 비로소 연극이 더욱 알차고 의미 있어졌으며,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즘 무대에 서는 많은 후배를 보며 안타까운 오류를 발견하곤 합니다. 배역에 자신을 온전히 몰입시키기보다, 인물을 자꾸만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오려고만 하는 태도입니다. 작가가 텍스트로 창조해 둔 인물에게 단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첫째, 작품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우리는 그 존재의 아주 사소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알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연극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활동의 하나나, 포트폴리오 채우기용 수단으로 여겨서는 결코 인물에 닿을 수 없습니다.
둘째,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야 합니다.
몰입이란 그 인물처럼 사고하고, 그 인물처럼 행동하며, 그 인물처럼 느끼는 원시적이고 순수한 과정입니다.
03
AI 시대, 대체 불가능한 인간의 예술
세상이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영역을 무섭게 대체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무대 위에서 인간과 인간이 직접 부딪히며 호흡하는 원시적인 공연 형태인 '연극'만큼은 결코 AI가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감히 연극이야말로 기술로 대체 불가능한, 인간이 다루는 예술 중 단연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어느덧 제 나이도 예순을 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생의 황혼기는 어쩔 수 없이 조금씩 협소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저에게 연극 무대만큼은 전보다 훨씬 더 무한하게 열려 있음을 느낍니다.
지금의 저는 치기 어린 20대 못지않은 창의력과 집중력, 그리고 뜨거운 열정을 온몸과 마음, 영혼에 무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무대에 선다는 설렘으로 가득 찬 '연극배우의 인생'을 삽니다.
공연 시작 직전, 객석의 소음이 잦아들며 종이 울리고 이윽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암전(Blackout)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어둠은 끝이 아닌, 곧 시작될 빛의 서막입니다. 저의 새로운 무대는 앞으로도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적 예술성을 향해 멈추지 않고 정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