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판과 나무합판, 스티로폼, 덕트테이프, 전선, 바세린, 요다 인형, 위스키병, 박스, 돌, 두루마리 휴지 등이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입구를 지나 작품을 마주한 순간, 함께 방문한 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 질문은 곧 우리 모두가 갖는 질문이 된다.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창작은 어디서부터 출발하고, 우리는 예술 앞에서 어떤 감동이나 경외를 기대하는 걸까. 이렇게 톰 삭스의 전시는 예술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만든다. 어쩌면 지인이 한 질문 그 자체가 이미 예술을 받아들이는 첫걸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 전시 전경
삶을 연출하는 예술 감독
톰 삭스를 설치 작가라고 칭하기엔 그의 작업은 훨씬 복합적이다. 그는 스튜디오를 우주기지로 탈바꿈시키고, 자신과 팀원들을 ‘임무 수행자’로 조직하여 프로젝트에 몰입한다. 그는 작업자이자 연출가이며, 배우인 동시에 이야기 설계자로서, 하나의 생애 시스템을 전시 공간에 구현한다.
<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는 단순한 SF적 상상으로 이루어진 우주 오마주 전시가 아니다. 톰 삭스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역사, 우주 개발의 환상과 현실, 자본주의 시대의 기술과 감정,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과 관계라는 복합적인 주제를 해체하고, 다시 새로운 서사로 엮어낸다. 그 서사는 화려하지 않다. 거칠면서도 섬세하고, 그럴듯하면서도 불완전하다. 실제 크기로 재현한 달 착륙선(LEM)은 합판으로 만들어졌고, 우주복은 어쩐지 좀 헐렁해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장면은 진심 어린 탐구의 결과다. 튜토리얼 영상을 만들고, 아틀리에에서 직접 제작 과정을 촬영하고, 팀원들과 임무를 수행하며 남긴 기록들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예술 시스템’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브리콜라주의 실천자, 불완전함의 미학
톰 삭스의 작업에는 손의 언어가 빈틈없이 녹아 있다. 기계적인 정밀함보다는 사람의 감각과 오차를 존중한다. 테이프가 비뚤게 붙어 있거나, 접착제가 드러나거나, 나사가 비스듬히 고정되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완벽한 외형보다는 그 안에 담긴 작업자의 정신이다.
이는 구조주의 철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브리콜라주’ 개념과 연결된다. 브리콜라주1)는 주어진 재료 안에서 즉흥적으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예술 기법을 말한다. 톰 삭스는 이 개념을 예술 실천으로 확장한다. DIY 문화와 장인정신, 반(反)산업적 감수성이 결합된 이 방식은 현대미술이 얼마나 유연하게 다채로운 방식을 포용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손에 잡히는 것들로 그가 매료된 NASA의 물건들을 만들어낸다. 그가 만들어낸 물건들이 모여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아니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우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실제 크기로 재현한 작품인 달 착륙선(왼쪽)
우주 지상 관제 센터(오른쪽)
규율과 유머 사이, 철학이 머문 공간
이 짧은 문장은 톰 삭스 스튜디오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빠르게 돌아가는 오늘날의 창작 환경 속에서 이 말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그가 말하는 ‘Code’는 창작의 규칙이나 통제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예술가가 자신의 감각과 흐름을 지키기 위한 자기 윤리에 가깝다. 톰 삭스는 예술은 반복 속에서 태어나고,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질서라고 믿는다. 결국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태도이고, 완성도보다 과정인 것이다.
그런 신념은 작품에 담긴 유머 속에서도 드러난다. 유머는 종종 현실을 가장 진지하게 말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전시장 곳곳엔 유쾌한 장면들이 숨어 있다. 실제 탐사차를 참고해 만든 로버에는 골프채나 빗자루, 삽 같은 일상용품이 함께 놓여 있고, 뒤집힌 우산이 안테나처럼 꽂혀 있다. 요다 인형이 불쑥 등장하거나, 부품 수리소에 스타들의 사진이 붙어 있는 장면은 피식 웃음을 자아낸다. 모든 것은 장난인 듯 진지하게, 어지러운 듯 섬세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기묘한 조형 언어는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예술에 도달할 수 있는 감각의 폭을 한층 넓혀준다.
예술과 관람의 경계 허물기
이 전시는 단지 작품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시장 중심에 서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주 탐사 기지에 발을 들인 듯한 기분이 든다. 관람객은 낯설고도 흥미로운 우주 공간을 천천히 거닐며 장비를 관찰하고, 디테일을 읽으며 그 안에 깃든 이야기를 차근히 음미하게 된다.
처음엔 단순히 구경하던 관람객도 어느새 탐험대의 일원이 된 것처럼 몰입한다. 무엇이 작동하는지, 앞으로 남은 임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신 관람객은 기기를 들여다보고, 우주 지상 관제센터(MCC)에 앉아보고, 작업자의 손길을 감각적으로 느끼면서 하나하나 해석해 나간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멀티미디어 설치 작품 'Faith(믿음)'까지 마주하면 관람객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까지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여정은 수동적으로 예술을 관람하던 시각적 대상에서 벗어나, 체험을 통해 확장하는 구조로 전환시킨다. 톰 삭스는 관람객이 예술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으로 인식하게끔 하면서 우리가 예술과 관계 맺는 방식을 새롭게 구성해 나가도록 한다.
<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 전시 전경
예술이라는 항성계로의 도약
거대한 허구 같기도, 거룩한 재현 같기도 한 이 전시는 결국 우리 자신의 사유로 향한다. 진지하게 허구에 몰입하는 순간, 그것이 현실보다 더 깊은 감정을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그래서 전시장을 떠나면서도, 엉성한 듯하지만 섬세한 작품들, 투박해서 오히려 더 진심으로 다가왔던 장면들, 그리고 그 안에서 묵묵히 흐르던 신념들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톰 삭스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 듯하다.
<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는 2007년부터 시작된 톰 삭스의 대표작 <스페이스 프로그램> 시리즈의 200여 점과 최초 공개하는 신작 10여 점까지 포함해서 역대 최대 규모로 선보인다.
-일정 2025. 4. 25 – 2025. 9. 7 (휴관일 없음)
-장소 DDP 뮤지엄 전시1관 (B2F)
-시간 10:00 – 20:00 (관람 종료 1시간 전 입장 마감)
-예매 :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5006027
1)문화 상품이나 현상을 재구축하는 전유의 한 가지 전술. 조합이나 땜질, 부분적인 문화 재조립을 뜻하며, 레비스트로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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