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전시 역시 타이밍이다. 개최 소식을 접하고 조금만 신경을 소홀히 하면 보고 싶던 전시를 놓친 사람이 되고 만다. 특히 직장인에게는 전시를 볼 수 있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뿐이기에 스케줄을 잘 짜야 한다. 하지만 평일에 사용한 시간과 체력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토요일 아침에 몸을 일으키는 것은 고행에 가까운 일이 되고, 그런 상태에서도 누군가의 전시를 보러 간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렇게 구구절절한 서론을 풀어내며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작가는 지금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진행하고 있는 캐서린 번하드(Katherine Bernhardt)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아니, 솔직하게는 ‘사랑하고 싶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일에 아직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사랑의 실패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문화적 공감대’였다.
“같은 시대, 다른 세계의 이야기”
캐서린 번하드의 이름을 처음 마주한 건 2022년 초, 한창 미술 작품 가격에 관한 리서치를 해보던 때였고, 주로 옥션 하우스 발 기사로 그의 이름을 접했다. 그런데 2023년, 이 비싸고 인기 있는 작품을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APMA, CHAPTER FOUR - FROM THE APMA COLLECTION>에서 볼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즘같이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이었고, 특히 힘든 한 주를 보냈음에도 캐서린 번하드라는 이름은 토요일 아침의 나를 침대 밖으로 끌어냈다.
그런데 기대하던 작품을 직접 봤다는 기쁨은 이내 혼란으로 바뀌었다. 캐서린 번하드는 E.T., 핑크 팬더, 심슨, 가필드, 크록스, 나이키 등 대중문화 요소를 차용해 팝 아트의 맥락에서 작업을 하는 작가다. 아는 캐릭터와 브랜드이지만, 작가가 그리는 문화적 아이콘을 아는 것과 그것을 향유한 경험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렇기에 작품 속 요소와 내가 좀 더 접점이 있었다면, 그의 작업과 좀 더 정서적인 측면에서 교감할 수 있었겠다 싶은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그렇다고 캐서린 번하드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지금 진행 중인 회고전 소식을 듣고 얼리버드 표를 사두었다. 하지만 티켓 사용기한 만료가 다가올 즈음, 이번에는 업무에 지쳐 있다는 핑계로 스스로 합리화하며 예매 취소 버튼을 눌렀다. 2년 전에는 무작정 작가의 작품이 실제로 보고 싶었다면, 이미 그런 경험을 한 지금은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효용이 있을지를 계산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를 단지 ‘모르겠다’는 단순한 이유와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에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없다면, 그와 ‘동시대’를 향유하고 있다는 이점을 활용해 그림에 담긴 메시지를 표면적으로나마 이해해 보거나 하다못해 그 작가가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작업을 하는지라도 알고 싶었다. 앎은 사랑하기를 수월하게 해주니까, 이 과정을 거치고 다시 그의 작품을 마주하면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색과 패턴으로 만들어 낸 즐거움
캐서린 번하드의 작업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대중문화 속 이미지들을 패턴처럼 반복하는 방식이다. 그는 핑크 팬더, 미키 마우스, E.T., 포켓몬과 같은 캐릭터, 나이키 로고, 코카콜라 캔, 바세린 등과 같은 소비재를 거대한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배치한다. 이러한 패턴 작업은 모로코 전통 직물과 현대 네덜란드의 왁스 직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로 전혀 상관없는 장식적 전통을 현대 회화로 가져와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구성한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방식에서 세계화와 소비문화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메시지를 읽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작가가 실제로 더 비중을 두는 것은 색과 물의 흐름, 즉 사용하는 재료와 작업이라는 행위 그 자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최고의 화가들은 자신의 예술을 지적으로 분석하지 않아요. 그저 만들어낼 뿐이죠. 중요한 건 색의 선택과 조합이에요. 그리고 저는 더 이상 구상화를 그리지 않아요. 지금은 오직 패턴 페인팅만 하고 있어요.”
이미지 출처 : 캐서린 번하드 인스타그램 @kbernhardt2014
작품에 포함될 요소를 선택하는 주요한 기준은 색과 재미다. 작가는 핑크 팬더의 밝은 핑크색이나 가필드의 오렌지빛, 윈덱스(Windex) 병의 화학적 파란색 등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작품에 포켓몬이 등장하게 된 것은 아들이 모으던 포켓몬 카드의 영향이었다. 작가는 포켓몬이라는 세계의 재미에 빠져들었고, 이는 2023년 데이비드 즈위너 갤러리 홍콩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의 메인 테마로 이어졌다.
작가는 스프레이 페인트로 윤곽을 그리고 바닥에 놓인 캔버스에 물을 섞은 아크릴을 덧입혀 번지고 흐르는 색감을 강조한다. 이때 모든 것의 핵심은 속도다. 그는 갓 뿌린 스프레이 페인트에 물을 더해 그림의 일부를 살짝 녹아내리게 표현하는가 하면, 마르지 않은 물과 물감이 서로의 영역으로 번지며 만들어 내는 얼룩을 흥미롭게 지켜보기도 한다. 종종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시간 낭비를 지양하며, 인생은 짧기에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스터디를 통해 캐서린 번하드는 동시대 서구권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소비주의를 풍자하는 작가에서 색과 패턴을 기반으로 작업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작가로 재인식되었다. 이는 나의 ‘사랑하기 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누군가가 자기 일을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은 결과물이 나의 취향과 이해에 얼마나 닿아 있는지와 무관하게 상대를 새롭게 바라볼 여지를 열어준다.
캐서린 번하드의 작품에 사회적 메시지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며, 작품에 차용한 캐릭터들에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시선을 사로잡는 색과 구상을 벗어난 형태적 자유로움이었다. 다시 그의 작품을 마주한다면, ‘문화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 형광 톤의 색과 흘러내리는 형태가 주는 감각적 즐거움을 만끽하며 이전과 다른 눈으로 그의 작품을 바라볼 수 있을 것 테다. 그러니 다시 전시 티켓을 예매하고 그를 사랑할 기회를 잡아 보아야겠다.
-일정 : 2025. 6. 6 ~ 2025. 9. 28 (매주 월요일은 휴관 )
-장소 :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
-시간 : 10:00 ~ 19:00 (입장마감 18시, 전시 종료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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