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그 사람의 해사한 미소 뒤에 숨어 있는, 남모르게 흘린 눈물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밝음의 뒷모습에는 미처 말하지 못한 그늘이 수두룩하고, 잘 웃는 사람일수록 그 이면엔 슬픔과 고통을 더 품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웃음은 슬픔의 정화일까, 아니면 고통을 가리는 얇은 꺼풀에 불과한 것일까. 더 나아가, 고통은 정말 예술을 통해 치유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예술은 그저 고통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뿐인 것일까.
호암미술관에서 마주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개인전 <덧없고 영원한>은 이런 질문을 끝없이 되풀이하게 만든다. 전시 제목은 모순적으로 다가오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듯 그녀의 작품들은 모순적인 두 단어가 뒤엉켜 있다. 나선형으로 얽혀있는 전시장 입구의 <커플>처럼… 서로 부둥켜안은 듯한 두 형상은 사랑과 상처, 연결과 단절의 경계에 따라 요동치듯 보인다. 포근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작품은 마치 부르주아 자신이 평생 견뎌낸 관계의 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듯하다.
<덧없고 영원한> 전시 전경
이렇듯 그녀의 세계는 단일한 감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거대한 거미 조각 <마망>을 보여주는 작가로 생각했던 나에게 그녀의 세계가 얼마나 조용하게 침잠하면서도 동시에 거칠게 진동하는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작품을 바라보면 그녀가 자신의 기억과 결핍, 고독, 트라우마를 하나하나 꺼내놓으면서 쌓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손끝에 오래 쥐고 있던 피묻은 돌멩이를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상처의 조각들인 돌멩이들을 한데 모아 전시를 하는 것 같았다.
좁은 철망 구조 안에 오브제들을 배치한 〈밀실〉은 개인의 기억, 고통, 내면의 상태를 시각화한 공간이다. 철창 틈 사이로 우리가 엿보는 듯한 경험은 심리적 성찰을 유도하는 동시에, 내밀한 상처를 침범하는 듯한 불편함을 안겨준다. 또한 섬뜩한 붉은빛이 감도는 <붉은방(부모)>은 그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가 살아 움직이듯 연상된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 트라우마의 근원이 강렬하면서도 내밀하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전시를 보면서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라야 했다. 그녀의 절절하고 사늘하며, 갈망하고 대항하는 고백들을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겨웠기 때문이다. 관람하는 동안 어떤 작품은 훅 들어와 목울대를 자극했고, 어떤 작품은 내 안의 오래된 상처와 맞닿아 신음을 내는 듯했다. 어쩌면 그녀의 삶을 따라가는 건, 그녀의 고통을 잠시 대신 짊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덧없고 영원한> 전시 전경
이렇게 부르주아의 예술은 개인적인 기억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 삶의 보편적인 상처들이 어떤 구조로 되풀이되는지 보여주는 시각적인 진술이다. 그녀는 어머니를 ‘거미’로 불렀는데, 집을 지탱하는 힘이기도 하고 동시에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기도 했던 그 이미지가 그녀의 예술을 관통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거미는 어머니의 상징을 넘어, 아픔을 지탱해준 기억이자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파괴와 보호, 상처와 치유 사이의 미묘한 경계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전시 곳곳에 놓인 그녀의 고백 같은 노트와 텍스트는 예술가로서 삶을 번역하는 과정에 힘을 더 실어준다. 그녀는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다양한 형태의 예술로 견뎠다. 상처를 직시함으로써 도리어 그 상처에 압도되지 않는 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예술적 원천은 분명 고통이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고통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언어화하고, 다시 내보내는 과정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 그리고 삶과 화해하고 있었으리라. 그것은 치유의 완성이라기보다, 치유의 노력에 가깝지 않을까. 고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모양으로 거듭나며, 다른 시간의 빛을 받아 또 다른 의미를 만든다. 즉 고통을 말끔히 정화하긴 어려워도 변주할 순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변화를 예술로 집착적으로 기록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한 작품씩 넘어갈 때마다 그녀의 작업에서 묘한 고요함이 다가온다. 그녀가 평온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가 너무 깊어 그 깊이 때문에 끝내 고요해지는 순간에 가까웠다고 할까. 고통과 화해했다기보다, 고통의 언어를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아우라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예술로 끊임없이 발화하면서 자신을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모든 작업은 살아 숨쉬고, 영원히 젊고, 처절하게 함축적인지도 모른다.
전시는 사라지는 것과 남아 있는 것, 무너지는 것과 견디는 것, 고통과 치유, 증오와 사랑… 이 모순적인 모든 관계가 서로 얽히면서, 불편하면서도 미묘한 균형을 이룬다.
결국 그녀의 삶도, 우리의 삶도 덧없지만, 그 덧없음이 남긴 감정의 무늬는 영원에 가까우리라. 그 무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가진 상처도 조금은 다른 결로 빛나지 않을까. 그 순간이야말로 예술이 가진 힘이라고 믿는다. 상처를 사라지게는 못하지만, 그 상처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힘. 덧없음 속에서 영원을 바라보게 하는 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