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데이미언 허스트의 개인전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는 전시 시작 전부터 말이 많았다. 전시는 죽음과 영생, 의학과 욕망, 예술과 상업성 등 허스트가 오랫동안 작업해 온 주제들을 설치, 조각, 회화 작업으로 풀어낸다. 특히 포름알데히드 수조 속에 담겨진 박제된 상어 작품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과 다이아몬드 해골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 등이 포함되며 또 다시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허스트의 작품 앞에서 많은 관람객들은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과연 예술인가?”
죽은 동물을 전시장 안으로 데려오고, 수천 마리의 나비를 박제하며, 약을 배열한 그의 작업은 여전히 불편하게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존재와 죽음에 대한 강렬한 사유로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충격을 상품화한, 이해하기 어려운 거북한 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허스트는 생명 윤리 논란 외에도, 예술의 상업화 문제와 함께 현대미술계에서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당혹감이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한국 문학 역시 오래전부터 비슷한 충돌을 경험해 왔다. 특히 1930년대 등장한 전위문학은 당시의 독자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문학”이라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이상의 <오감도>는 숫자와 기호의 반복, 띄어쓰기도 마침표도 없이 파편화된 문장 구조를 사용하며 기존의 시 형식을 급진적으로 해체했다. 당시 독자들은 작품을 난해하고 비정상적이라고 받아들였고, 급기야 연재 중단 요구로까지 이어졌다. 오늘날엔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적 전위 텍스트로 평가받지만, 당대에는 “미친 사람의 잠꼬대”라는 비난 속에서 읽혀야 했다.
물론 허스트와 이상의 작업은 시대도, 장르도 다르다. 그럼에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기존 예술의 문법을 의도적으로 흔들었다. 허스트가 회화와 조각의 전통적 재현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동물의 사체와 의학적 장치를 작업 안으로 들여왔다면, 이상은 문법과 서사의 안정성을 해체하며 언어 자체를 낯설게 만들었다. 관람객과 독자가 느끼는 불편함 역시 비슷하다. 익숙한 규칙이 무너질 때, 사람은 보통 거부감부터 느끼게 되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점점 개념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점도 흐름을 같이한다. 허스트의 작업은 전통적인 의미의 손기술보다 아이디어와 구조, 맥락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실제로 그의 대규모 설치 작업은 스튜디오 시스템과 협업 제작 방식으로 완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현대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작 방식이지만, 대중에게는 여전히 ‘직접 만들지 않은 것도 예술인가’라는 의문을 남긴다.
한국 문학 역시 20세기 후반 이후 언어의 실험성과 형식의 해체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일부 실험시는 서사와 감정의 흐름보다 단어의 배열과 감각 자체를 중시했고, 독자에게 자연스러운 이해보다는 낯선 경험을 요구했다. 이는 문학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르가 아니라, 언어 자체를 탐구하는 예술이라고 선언하는 듯했다.
더불어 이들의 전위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바다와 맺고 있는 양가적 관계 역시 흥미롭다. 허스트는 경매 시장과 미술 산업의 구조를 적극 활용하며 ‘스타 작가’라는 현대미술 시스템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작업은 종종 예술과 자본의 관계를 드러내는 사례로 언급된다.
한국 현대문학 또한 소비사회와 도시문화의 확산 속에서 자본주의적 감각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특히 1990년대 이후의 일부 소설과 시는 브랜드, 소비, 도시적 욕망 등을 적극적으로 서사화하며 현대인의 불안과 공허를 묘사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순된 감각이 문학의 중요한 소재가 된 것이다.
신의 무한한 권능과 영광을 묵상하며
생각해보면 예술이라는 것이 우리를 언제나 편안하게 감싸 안을 의무는 없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술들은 대개 처음 등장했을 때 불편함과 논란을 동반하기도 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데이미언 허스트의 해묵은 논쟁 역시 단순히 찬반의 문제로만 얘기할 순 없다. 그의 예술은 이제 낡았을지언정, 여전히 우리에게 근원적인 물음을 되새기게 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외면하고 싶은 현실의 불안과 죽음, 욕망까지도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하는가.
국립현대미술관 안의 거대한 유리 수조 속에 갇힌 상어와 파리로 들끓는 소머리, 그리고 한 세기 전 독자들의 마음을 헤집어놓았던 낯선 문장들은 비슷한 질문을 한다.
익숙한 형식을 넘어선 예술을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그 작품들이 당신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불쾌함과 충격을 남겼다면, 그것은 예술의 실패일까, 아니면 동시대의 예술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가장 생생한 증거일까?